우리나라는 많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만 단위의 숫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만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숫자를 표현할 때는 천 단위 숫자 체계를 갖고 있는 나라의 표현 방식을 따라서 쓰고 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우리가 숫자를 쓰고 읽을 때 불편하게 되고 효율도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의 모습이 일그러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점이다. 마치 백조 새끼가 오리와 어울려 살면서 자기가 백조인지도 모른 채 살고 있다고나 할까?
네 자리 수체계를 갖는 우리는 이상하게도 세 자리마다 자릿점을 찍는다
만 단위의 숫자 체계라 함은 만 단위마다 그것을 지칭하는 새로운 수 개념(용어)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많은 국가가 쓰고 있는 천 단위의 숫자 체계는 말 그대로 천 단위마다 새로운 개념(용어)이 있다는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천 단위 숫자 체계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보도록 하자.
사람들은 보통 열 개 이상의 것을 지칭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열 개보다 한 개 더 많은 것을 표현할 때 ‘열’에 ‘하나’를 붙여 써서, 열하나라고 한다. 열아홉까지 가고 나면 ‘열열’이라 하지 않고 새로운 표현인 ‘스물’을 쓴다. 물론 한자권에서는 ‘열(十)’이 ‘두(二)’ 개 있다는 뜻으로 이십(二十)이라 한다. 그리고 서른, 마흔, 쉰 등을 거쳐 아흔아홉까지 간 뒤에는 ‘백’이 나온다.
자, 우선 천 단위 숫자 체계를 보자고 했으니, 수 체계가 천 단위로 되어있는 문화의 주요 언어인 영어로 살펴보자. 이 숫자 체계에서는 일, 십, 백, 천까지만 표현을 한다. 그래서 각각 one, ten, hundred, thousand라는 용어가 있다. 그다음,즉 천의 열 배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열(十)이 두(二) 개 있는 이십(二十)의 형태처럼 ‘십천’이라고 표현한다. 십천이라고 하면 어색할 테지만 그들의 언어인 ten thousand라고 하면 아주 익숙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nine hundred ninety-nine thousand nine hundred ninety-nine (999999)까지 간 뒤 이보다 1이 큰 1000000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표현할까? 천의 천 배인데, 즉 thousand의 thousand 배인데, 천 단위 숫자 체계를 갖고 있는 문화권에서는 이때마다 새로운 용어가 나타나며 그것은 바로 million이다. 즉 1000000은 one million이다. 그럼 이 million의 천 배는? 그렇다. 새로운 용어가 또 나오며 그것은 billion이다. 그다음은? trillion이다. 자, 그리고 이 천 배마다 또 다른 용어로 우리가 많이 쓰는 접미사가 있다. thousand에 대응하는 kilo-(k), million에 대응하는 mega-(M), billion에 대응하는 giga-(G), 또 trillion에 대응하는 tera-(T)이다. (그래서 3000g(그램)은 3kg, 1000MB(메가바이트)는 1GB(기가바이트)로 줄여서 쓴다.)
이런 천 단위 숫자 문화권에서는 그럼 숫자를 어떻게 표기하고 읽을까? 우선 648703156이라는 숫자를 보자. 천 단위 수 체계에서는 당연히 숫자를 천 단위로 끊어 읽으며 천 단위로 표기한다. 여기서 천 단위로 표기한다는 뜻은, ‘천(thousand)’이 10을 ‘세’ 번 곱한 것(10*10*10)이므로 숫자 ‘세’ 자리마다 자릿점(,)을 찍는다는 뜻이다. 즉 648703156은 648,703,156이라고 표기한다. 그리고 읽을 때는 저 자릿점을 경계로 숫자를 읽는다. 자릿점으로 나눠진 첫 숫자인 648을 먼저 읽으면, six hundred forty-eight이고, 그다음 숫자 703은 seven hundred three, 마지막 156은 one hundred fifty-six다. 그리고 저 숫자를 한 번에 읽기 위해 천 단위마다 그들의 수 체계인 thousand, million을 뒤부터 쉼표 자리에 붙여서, ‘six hundred forty-eight’ MILLION ‘seven hundred three’ THOUSAND ‘one hundred fifty-six’가 된다. 즉 그들의 수 체계와 언어와 표기가 한 몸을 이루어 수의 해석이 쉽게 된다. 물론 그들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그럴까?
우리는 모두가 알다시피 만 단위의 숫자 체계를 쓰고 있다. 일, 십, 백, 천까지 간 뒤, 천의 열 배인 ‘만’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있어서 9999보다 1이 큰 10000이라는 숫자를 ‘십천’이라 하지 않고 ‘만’이라고 읽는다. 역시나 이 ‘만’ 단위마다 새로운 개념(용어)이 있으며 억, 조, 경, 해 따위가 있다. 단순히 숫자 크기로만 따지면 천 단위 숫자 체계를 사용하는 문화권보다 10배나 높은 수준의 숫자 체계를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기할 때 천 단위의 표기법을 따라 쓰게 되면서 숫자를 적고 읽을 때 어려움을 겪는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는 크기인 백만까지는 그래도 살아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버릇이 들어서 2,762,410이라는 숫자 정도는 276만 2410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자, 그러면 74,648,616,034,876,613라는 숫자는 바로 읽을 수 있을까? 친절하게 자릿점까지 찍어 줬지만 이를 한 번에 읽고, 얼마만큼의 수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흔히 쓰는 수의 규모가 아니라서 그럴까? 아니다. 우리의 수체계와 다른 표기법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얘기했다면 우리처럼 만 단위 숫자 체계를 쓰는 문화권에서는 자릿점을 만 단위, 즉 네 자리마다 자릿점을 찍어야 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의 숫자는 7,4648,6160,3487,6613으로 써야 한다. 물론 저 쉼표(자릿점)는 만 단위의 숫자 체계 용어가 들어갈 자리로서 뒤에서부터 따지면 각각 만, 억, 조, 경의 자리이다. 그래서 이젠 보기만 해도 ‘아, 7경 정도의 숫자네’하고 바로 알 수 있고, 읽는 것도 저 자릿점 구간별로 읽으면서 만, 억, 조, 경만 붙이면 된다. 자릿점 구간마다 숫자를 하나씩 보면 칠(7), 사천육백사십팔(4648), 육천백육십(6160), 삼천사백팔십칠(3487), 육천육백십삼(6613)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당연히 만 단위 용어를 넣어주면 끝이다. 그래서 7,4648,6160,3487,6613은 ‘칠경 사천육백사십팔조 육천백육십억 삼천사백팔십칠만 육천육백십삼’이다. 일부러 얄궂게 큰 숫자를 예로 들었으나 우리가 보통 크다는 숫자를 표현해보면 8,4612,8910는 자릿점이 두 개니까 만, 억 단위 숫자이고 읽어보면 8억 4612만 8910이 된다. 결국 만 단위 숫자 체계를 가진 우리는 숫자를 표기할 때 네 자리마다 찍어서 써야 수 체계와 언어 표기가 일치되고 수에 대한 이해와 계산이 빨라진다.
만, 억, 조, 경, 해... 자리마다 자릿점(,)을 대신 쓰면 된다
몇 가지 예를 보자. 30일 동안 15만 원씩 번다면 총 얼마를 벌게 될까? 우선 15만 원에서 ‘만’ 단위는 무시하고 30과 15를 곱한다. 그럼 450이다. 여기에 잠깐 빼놓은 ‘만’을 붙이면 답이 된다. 즉 450만 원이다.

그럼 300일(약 1년) 동안 천 원씩 모으면? '천 원'에서 천은 만의 십 분의 일(0.1)이니까 0.1만이다. 즉 여기서 일단 ‘만’을 떼고 300에 0.1을 곱하면 30이니, 결국 답은 30만 원이다.

그럼 ‘천’ 일 동안 매일 ‘만’ 원 씩 모으면? 말 그대로 ‘천만’ 원이다.

이번엔 전 국민 5000만 명 기준으로 모든 사람에게 20만 원씩 준다면 얼마가 필요할까? 각각에서 ‘만’을 떼면 5000과 20이다. 둘을 곱하면 10만이다. 벌써 ‘만’이 하나 생겼는데, 계산 전에 두 개의 ‘만’을 떼었으니 결국 ‘만’이 ‘세’ 개나 있는 셈이고 그래서 답은 10조이다. (조는 ‘만’이 ‘세’번 곱해진 수다.) 달리 계산하면, 5000만 명의 5000은 0.5만이다. 그래서 '5000'만 명은 '0.5만'만 명, 즉 우리나라 인구는 0.5‘억’ 명(0.5만×만)이고, 한 사람당 20‘만’ 원이니, 0.5 곱하기 20인 10에 ‘억’에 ‘만’을 곱한 ‘조’를 붙이면, 10조가 된다. 그래서 10조 원만 있으면 국민에게 20만 원씩 줄 수 있다.

우리는 네 자리 수체계를 가졌는데도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세 자리마다 자릿점을 찍으니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따라 한다.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입는 옷을 따라 입는 것이다. 하도 그렇게 오래 입고 있으니 불편한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렇게 입는 게 맞는 줄 안다. 이런 거 하나도 독립을 못하고 사니 어떤 것인들 우리만의 모습을 찾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심지어 외국에서 만든 컴퓨터 운영체제(OS)인 윈도95(98이었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운영체제 자체에서 네 자리마다 자릿점을 찍을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졌다. 왜일까? 그 기능을 썼어야 할 우리들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진 게 아닐까? 자기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남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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