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청첩장과 통장번호

색다른 틈 2020. 8. 23. 12:45

   결혼식에 가 보면 잔칫날 아니랄까봐 다들 신이 나있다. 신랑, 신부나 그들의 식구들은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고, 손님들은 저들끼리 오랜만에 만나 또 흥겹다. 또 주인공들의 가까운 친인척들 중 몇몇은 북적이는 곳에서 축의금을 받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끔 들리는 안타까운 얘기가 있는데, 그 축의금을 누군가가 훔쳐갔다는 얘기다. 손님이나 친인척처럼 행동하면서 축하금을 훔쳐가는 경우다.

 

   이런 얘기를 듣다가 아예 축의금을 통장에 입금하는 방식으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앉은자리에서 지구 반대편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돈을 보낼 수 있는 세상 아니던가? 가뜩이나 정신도 없는 잔칫날 수많은 돈을 감당해야 할 사람을 생각하면, 차라리 혼주나 신랑, 신부한테 바로 입금을 해주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축하금 내려는 사람은 괜히 현금 찾으려 미리 준비할 필요도 없고, 축의금 받는 친인척들도 그 큰돈 관리할 어려움이 없어져서 좋고... 어차피 와야 할 사람들한테 청첩장을 돌리니 그 청첩장 안에 혼주랑 신랑, 신부 통장번호를 적어 놓으면 사람들이 쉽게 축하금을 전해주지 않을까?


축의금을 전달하는 편한 방법, 모두가 즐겨 쓰는 통장 이체


   물론 나는 실패했고, 이런 얘기를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돈 달라고 광고하는 거냐고, 그걸 보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그래, 돈에 민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럴 수 있지. 본질보다 체면이나 겉으로 보이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니까. 그래서 내 결혼식 때는 20년 정도 꿈꿔왔던, '청첩장에 통장번호 적기'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청첩장에 통장번호 적는 게 그리도 이상한 것인지.

 

   우선 우리가 주고받는 청첩장을 생각해보자. 내가 청첩장을 받았으면 무조건 그 결혼식에 가는가? 또는 청첩장을 못 받거나 안 받았으니, 이 경우에는 무조건 그 결혼식에 가면 안 되나? 청첩장을 받았어도 미리 다른 약속이 있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면 못 갈 수도 있다. 즉, 청첩장을 받았다고 해서 꼭 가야만 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거꾸로 청첩장을 못 받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한테 소식을 들었을 경우, 직접 얼굴 보고 축하해 주고 싶다면 가면 된다. 그걸 누가 말리겠는가? 축하해 준다는데... 얘기를 좀 더 진행해보자. 이 청첩장 안에는 많은 정보가 있다. 예식장까지 오는 지도도 그려져 있고, 차를 타고 올 때, 버스를 타고 올 때, 전철을 타고 올 때 어떻게 오면 되는지 적혀 있기도 하다. 자, 그럼 굳이 지도까지 그려 줬으니 꼭 여길 가야 하나? 역시나 다른 약속이 있거나 여러 이유가 있으면 안 갈 수 있다. 약도를 그려줬다고 해서 꼭 오라는 얘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전철을 타고 오는 방법을 적어 줬다고 해서 꼭 전철을 타고 갈 필요도 없다. 버스 노선을 적어 줬다고 해서 꼭 버스를 타고 오라는 얘기도 아니다. 심지어 멀리서 식을 치를 때는 버스를 빌려서 오시기 편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이렇게 버스를 마련해 줬으니 꼭 그 버스를 타고 가야 하나? 청첩장에 뭔가가 적혀 있다고 해서 꼭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런 안내를 따라 편한 방법으로 선택하란 얘기다. 배려인 거다. 자, 그럼 여기에 통장번호를 적었다고 하자. 그럼 꼭 통장에 입금을 하라는 뜻일까? 역시나 통장에 입금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청첩장에 통장번호가 찍혀 있다고 해서 그렇게 민감하게 굴 일이 아니란 얘기다. 그런 논리라면 지도까지 그려 줬으니 꼭 그렇게 안내된 길로 거기를 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뜻이 아니지 않은가?


청첩장에 약도가 그려져 있다고 해서 꼭 그 길로 반드시 와달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돈에 너무 민감하다. 참 신기하다. 사람들은 남의 집 경사 소식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먼저 할까? 많은 사람들이 '아, 또 돈 나갈 일 생겼네. 얘가 지난번에 나한테 얼마 했지?' 이런 생각을 한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그 기쁜 날을 함께 해줄 생각보다, 그냥 돈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거꾸로 그런 행사를 치를 땐 얼마가 들어올지 기대를 한다. 내가 저 녀석 뭐 할 때 얼마를 해줬는데, 이번에 내 행사 때 그 정도는 해주겠지? 이런 생각들... 심심찮게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들을 보면 '나는 그 녀석 뭐할 때 얼마 했는데, 걔는 그보다 적게 내고 여러 사람 데리고 와서 밥은 엄청 먹고 가더라' 뭐 이런 얘기들이 수두룩하다. 결국 서로 돈 주고받을 생각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그걸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는 못하는 사람들이다. 참 가증스럽다. 심지어 요즘엔 주변 사람들한테 돌잔치 얘기를 들으면 겉으로는 축하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돈 나가게 요즘 세상에 돌잔치를 한다고 난리냐'고 뭐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경우 그 즐거움을 함께 할 마음보다, 들고 나는 돈 생각하면서, 나는 줬는데 걔는 안 주더라 이런 돈 계산이나 하고 있다.

 

   자, 그럼 통장번호가 없는 보통의 경우, 그러면 축의금을 안 내나? 그렇지도 않다. 못 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남의 손에 축의금을 들려 보낸다. 어차피 축의금을 줄 생각이면 가던 못 가던 주고 있고, 아예 줄 생각이 없으면 가지도 않고,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처럼 가더라도 안 준다. 어차피 자기네 마음대로 돈을 주거나 말거나 하면서 청첩장에 통장번호 찍혀있다고 달라질 게 무언가? 번호가 찍혀 있어도 원래 하던 데로 하시라. 줄 돈이면 주고, 말 돈이면 말고. 뭘 그 번호 하나에 쫄고 그러나? 오히려 요즘은 못 가게 된 경우 미안하다고 연락하면서 통장번호 알려달라고 물어보기도 하지 않는가? 축의금이라도 넣어주겠다고... 그래서 미리 알려준 것에 불과한데 민감해 하기는... 돈으로 사람 따지는 속마음이 드러난 것 같아서 움찔하는 건가?


어차피 가던 못 가던 안 줄 돈이면 안 주고, 줄 돈이면 어떻게든 주지 않던가


   그럼 굳이 여러 사람 피곤하게 굳이 통장번호를 청첩장에 넣으려는 이유가 뭐냐고? 앞에서 얘기했듯이 실용을 생각해서다. 정신 복잡한 그날 큰돈을 관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리고 현금 준비하는 것도 귀찮은 일 아닌가? 청첩장 돌릴 때 미리 통장번호를 알려주면 내는 사람은 시간 날 때 입금하면 그만이고, 받는 쪽에서는 그날 큰돈 다루느라 힘쓸 필요도 없지 않은가? 괜한 사고 때문에 기분 망칠 일도 없고... 자기는 못 가는 경우, 가는 사람 손에 내 대신 전해달라고 불안불안하게 돈 쥐어 줄 필요도 없고... 어차피 줄 돈이라면 서로 편한 게 좋은 것 아닌가? 말 그대로 요즘같이 편한 세상에... 왜 실속을 따지지 못하고 괜한 것에 기싸움을 하나?

 

   안타깝게도 요즈음엔 지구 전체에 돌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모이는 게 쉽지 않아 졌다. 그래서 결혼식도 취소하고 난리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청첩장에 통장번호 적는 경우가 가끔 있나 보다. 차라리 잘 된 것 아닌가? 거기 가서 돌림병 걸려서 서로 민망해지느니 실속 있게 축의금도 전달하고 축하도 해주고...

 

   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제대로 되었다면, 자기 기쁜 일 있을 때 주변 아는 사람들 불러다가 맛있는 것도 먹이고 즐거운 시간 갖고 같이 어울리는 것에 뜻을 두었겠지. 그런데 언제부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행사라는 게, 잔치라는 게, 서로 주고받은 돈이 같은지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축하금이 차이가 나면 관계를 정리하는 거고, 같으면 계속 가는 거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건가? 행사에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기 싫은 데, 내가 받은 게 있으니 가야지, 이런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나중에 받을 일 생각하면 미리 다니면서 뿌려 놔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진심으로 마음을 나눈다기보다 돈 장사하러 다니는 사람들 같다.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일까?


중요한 것은 서로 마음을 나누고 돕고 함께 하는 것 아니던가


   결국, 청첩장에 통장번호를 적는 게 돈을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속으로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사람들이 남의 즐거움과 슬픔을 진심으로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고 받은 돈이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 좋은 세상 아니겠는가? 언제까지 돈의 머슴으로 살아갈 건가?

 

약도가 찾아오는 길을 알려주는 그림에 불과하듯, 통장번호는 돈을 어디로 넣을지 알려주는 숫자에 불과하다. 예식장에 붙어있는 '신랑측', '신부측' 표시와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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